본문 바로가기
[나의여행방]

덕수궁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와서

by 노란장미(아이다) 2018. 11. 12.

 

 

        
덕수궁(德壽宮)의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와서

 

* 위치;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 덕수궁(德壽宮) 조선시대의 궁궐로 본래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곳을 선조가 행궁으로 삼았다.

1611년에 경운궁(慶運宮), 1618년에는 서궁으로 불렸다.

1897년 선원전·함령전·보문각 등이 지어졌으며,

1900년 인화문·돈례문·영성문 등이, 1902년 중화전·관명전 등이 건립되었다.

1904년에는 즉조당·석어당·함령전 등이 중건되었고,

1910년에는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 건립되었다.

사적 제124호인 조선시대의 궁궐. 1611년에 경운궁, 1618에는 서궁으로 불렸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의 건립이
이뤄졌다. 1897년, 1900년, 1902년, 1904년에 걸쳐 궁궐의 건립과 중건이 진행되었고

1907년 고종이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꿨다. 1910년에는 근대 서양식의 석조전이 건립되었다.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 건축이 함께 남아 있으나,

조선의 5대 궁궐 중 규모는 가장 작고 전체배치가 정연하지 못하다.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조선말 고종이 살던 곳이다.

궁궐의 자리는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직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행궁이 되었다.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뒤 1611년 10월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1615년(광해군 7)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빈 궁궐이 되었으며

1618년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면서 서궁으로 불렸다.

인조는 이곳 별당에서 즉위했으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왕태후와 왕태자비가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했으며 1897년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건물의 건립이 이뤄졌다.

 

그 해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선원전, 침전인 함령전, 보문각 등이 지어졌으며

9월 17일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하고 소공동의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정궁이 되었다.
1900년(광무 4) 담장공사가 완공되었고 정문인 인화문 및 돈례문·회극문·영성문 등의 전문이
완성되었다. 그해에 선원전이 불탔다. 1902년 정전인 중화전과 관명전 등이 새로이 건립되었으며

1904년 대규모 화재로 많은 건물이 불타버렸으나 즉조당·석어당·함령전 등이 중건되었다.

이때 정문의 이름을 '대안문'이라 했다.

1905년 중화전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되었으며,

이때 '대안문'도 수리하여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이양하고 이곳에 살면서 현재의 이름인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순종이이곳의 즉조당에서 즉위한 뒤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종의 거처가 되었다.

1910년 근대건물인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전이 건립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함령전에서 죽었다. 1921년 중화전에 봉안했던 고종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Daum백과] 덕수궁 – 다음백과, Daum

 

* 2018년11월10일 미세먼지 '나쁨'인데도 불구하고 마스크 착용하고

금방이라도 떠날 것만 같은 만추에 아름다운 단풍을 보려고 덕수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덕수궁에 와보니 아직도 황홀하도록 불타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 참 다행이어

혼자만의 여유로움을 갖고 단풍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돌아왔다.

 


대한문








 







중화문

 

 


중화전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격적인 궁궐 중건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했으나

1902년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정전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는데, 1905년 중건되면서 원래 2층이던 것이 1층이 되었다.

 

중화전 앞의 품계석 

중화전 내부에 있는 옥좌

중화전 내부 모습



 




  

'석조전'은 현재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사용하고 있으며, 규모가 정면 17칸(54.2m), 측면 10칸(31m)인 3층 석조건축으로서,

기단부인 1층은 시중인들의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및 담화실 등으로 설계되었다.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리스(Doris)식 오더(order: 지붕과 기둥을 기본단위로 한 형식)로 열주랑(列柱廊)을 구성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고 거기에 각각 박공(牔栱: ∧모양으로 붙인 두꺼운 널)을 두었다.

이는 건물 앞의 정원과 더불어 18세기 유럽의 궁전건축을 모방한 것으로, 신고전주의양식건축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 지어진 서양식 건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순수 석조로 된 유일한 건물로서 의의가 있다.

설계자는 영국인 하딩(Harding,G.R.)이다.

 

석조전


석조전

'석조전'은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릭오더의 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었다.

건물 앞의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의 건축을 모방해 지은 것이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 후문

덕수궁 후문

 



준명당과 즉조당

드무....넓적하게 생긴 독

석어당

덕흥전과 행각

 

준명당과 즉조당

석어당

  



이 가을에 때아닌 철쭉이 피어서리


 




 

 

 

 

  

 

 

 

  

 

 

 







 



정관헌


  





덕흥전


좌측에 덕흥전.....중앙에 중화전.....우측에 석어당

덕흥전....우측에 석어당

행각과 덕흥전


 

 함녕전

 

함녕전을 나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