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버스로 20분 아찔한 고갯길을 올라왔다.
마츄피추에 관한 책과 그림엽서 몇장을 샀다.
천상의 문.
하늘-돗수리. 지상-표범. 지하-뱀
잉카 사람들은 3개의 신을 숭상했다고한다. 하늘 -콘돌-독수리, 지상
-표범. 지하- 뱀.
마추피츄 건축물엔 이를 뜻하는 세 개의 창문이 나
있었다.
위 사진의 집엔 세개의 창문이 크게 나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중의 하나라지만
사람의 힘으로 건설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마추피츄는 늙은 산이라는 뜻이고 맞은 펀에
와이야피츄라는 젊은 산이 있다. 해발
2450미터.정확한
연대도 알 수 없고 2천년 전의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1911년 예일대 교수,하이람빙검에 의해 발견된 잉카의 잊혀진
도시.
1만 여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발견당시
대부분의 미이라가 여자들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남자들은 전쟁터에 싸우러
나가 죽고 여지들은 이 곳에 남아 전염병으로 인하여
조용히 죽었을 거라는추측이다 태양의 신전, 지붕이 없는가옥들,
산비탈의 계단식 밭. 농사를 짓는데 쓰여진 태양시계, 대광장등의 석조
건축물이
남아 있다. 마추피츄 관광은 쿠즈코 역을 출발하여 오후 3시 30분에
다시 쿠즈코로 돌아오는 관광차를 이용하며
요새의 입구까지는 버스를 이용하는데
20분이 소요된다.
마추피츄 그리고 안개.
해발 2450m 산 안개가 눈높이에 와 있었다. 고산지대지만
기분이 상쾌했다.
산소가 부족할 것이므로 물을 마셔 산소를 보충해야 한다고해서
사람들은 물병 하나씩을 들고 올라왔다. 들고 다니는 것을 거치장스러하는
나는 맨 몸으로 올라 와 내려올 때가지
근 5시간을 물 한모금 마시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고산병은 체력하고도 상관 없고 당해봐야 안다고
했다.
가이드랑 일행들이 나를 제일 걱정했다는데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잉카제국과 잉카문명.1.
11세기말, 페루 남미 지역에서
발생되었으며 12세게에는 에쿠아도로,
볼리방, 콜로비아, 칠레, 아르헨티나,일부 지방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문자가 없는 문명이며 그 역사가 문현에 나타난 것은 1400 년 이후에 민화나
노인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무렵부터이다.
잉카제국은 15세기 후반까지가 전성기였다.16세기 초기에는 왕위 계승법으로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페허가 된 그러나 화려했던 잉카.
잉카문명과 잉카 제국.2.
1532 년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가 보병 110 명과
기마병 76 명을 이끌고 쿠즈코에 도착하여 비무장으로 회의를 하자고
제의를 하는데 이 때가 알카우 알파 왕의 시대였다.
다음 날 왕은 5000 명의 병사를 이끌고
비무장으로 나타났는데 스페인 군은 화승총으로 기습을 하여 2000
명을 살해하고
왕을 포함한 나머지는 포로가 된다
잉카제국과 잉카문명 .3
포로가 된 왕은 자기를 석방시켜 주면
모든 금과 은을 주겠다고
제의하는데 훗날 '피사로'는 그것을 모두 받고
왕을 처형시켜 버린다.이 때가 1533 년이며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피사로'그 자신도 1541 년 자기가
과거에 죽인 동료의 아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잉카제국이 크게 번창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라가지 이유기 있으나 ,
그중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것은 계단식 밭에 의한 곡류의 생산(주로
감자)
반란 방지를 위한 인구이동 키푸(매듭식
계산기)에
의한 통계관리, 발달된 도로망, 집단 노동, 뛰어난 석조 건축
기법,
발달된 외과수술등이다.
돌과 돌로 쌓은 그 사이는
요즘은 시멘으로 매꾸지만 그 시절에는 흙으로 그 안을
채웠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흙위앤
이름모을
들풀들이 자라고 더러는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하늘이 가까운... 팔을 올리면 구름도 잡힐 것 같은 고산지대에
청초하게 피어있던 들꽃들, 뒤돌오게하는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하는 청초하고 외롭던 모습의 꽃이여!
마츄피추 산 위의 안개.
안개는 흘러서 어디로 가나. 안개는 죽어서 어디로
가나.
요사이는 참 춥고 피곤해. 나 혼자 강을
건너고....
김성춘 . 방어진 안개의 일부.
안개는
잠시 나를 미치게 했다.
어쩌면 저렇게
보일 듯 말 듯 세상의
모두를 품어 안고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