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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여행방]

덕숭산 수덕사(德崇山 修德寺)[2]

by 노란장미(아이다) 2017. 4. 20.





덕숭산 수덕사(德崇山 修德寺)[2]

                                                                  


* 2017년4월16일(일)


* 위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9 (덕산면)


*'수덕사' 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本寺)이다.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 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599년(법왕 1)에 지명법사(知命法師)가 창건하였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상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광무 2)에 경허의 제자 만공(滿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하였다.

 우리나라 4대 총림(叢林)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 정진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좌우에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한

 백련당(白蓮堂)‧청련당(靑蓮堂)‧염화실(拈花室)‧조인정사(祖印精舍)‧무이당(無二堂)‧

 심우당(尋牛堂)‧황하정루(黃河精樓)‧천왕문‧금강문‧일주문(一柱門)‧범종각(梵鐘閣) 등이 있다.

 대웅전은 1308년(충렬왕 34)에 건립된 건물로서 건축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대웅전 안에는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약사불, 아미타불의 삼세불이 모셔져 있다.

 이 목조삼세불좌상(보물 제1381호)은 만공이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여래탑이라고도 불리는 삼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이 있으며,

 1936년 대웅전 중수 때 발견된 벽화는 건립 당시의 것으로서 주악공양비천도(奏樂供養飛天圖)‧

 수화도(水花圖)‧야화도(野花圖)‧금룡도(金龍圖)‧오선도(五仙圖)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까래에 희미하게 금룡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일주문은 도톰하게 깎은 돌기둥 두 개에 기와지붕을 얹고 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라고 쓴 현판은 손재형(孫在馨)의 글씨이며,

 지붕의 처마에는 붉은 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되어 있다.

 범종각에는 1973년에 조성된 무게 6,500근의 종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절의 산내암자로는 정혜사(定慧寺)를 비롯하여 견성암(見性庵)‧

 금선대(金仙臺)‧환희대(歡喜臺) 등이 있다.

 현재 이 절의 말사는 66개이다.

 이 가운데 정혜사에는 비구 선원인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으며,

 견성암에는 비구니 선원인 제일선원(第一禪院)이 있다.

 또 금선대에는 진영각(眞影閣)이 있으며, 진영각 안에는 만공의 영정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환희대는 『청춘을 불사르고』를 지은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하다가 죽은 곳이며,

 견성암 또한 김일엽이 기거하던 곳이다.


 이밖에 이 절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노사나불괘불탱(蘆舍那佛掛佛幀, 보물 제1263호),

 만공탑(滿空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 칠층석탑(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81호),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된 거문고(예산군 문화재자료 제192호) 등이 있다.

 노사나불괘불탱은 1673년(현종 14)에 제작된 괘불로서 노사나불을 단독으로 나타낸 독특한 형식의 그림이다.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공간을 오색의 광선으로 처리하여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만공탑은 만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운 탑으로서 구형(球形)의 둥근 돌이

 올려져 있는 특이한 부도이다.

 조인정사 앞에 세워진 칠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든 탑으로서 지대석 위에 기단 면석 외부로

 두드러지게 우주를 표현하고 있는데 면석에는 두께 10㎝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돌려져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옥신은 없는데, 그 대신 4개의 정사면체 석재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

 옥개석을 받치도록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근역성보관(槿域聖寶館)에 소장되어 있는 거문고는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으로부터 받은 것으로서 이 거문고에는 이조묵(李祖默)이 새긴 공민왕금(恭愍王琴) 이라는

 글씨와 함께 만공의 시가 새겨져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전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 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이 여인을 구경하러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定慧)'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 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갑자기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모양의 버선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이름을 '수덕사'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을 사랑한 정혜라는 청년은 인생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 라 하였다고 한다.

[출처;다음백과 대한민국 구석구석]